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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주교 프로필 (향년 95세 초대 천주교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프로필 (향년 95세 초대 천주교 안동교구장 )

본명René Marie Albert Dupont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
두봉 (杜峰, Du Bong)
출생1929년 9월 2일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루아레 오를레앙
사망2025년 4월 10일 (향년 95세)
경상북도 안동시 수상동 안동병원
국적프랑스| 대한민국 (복수국적)
재임기간초대 안동교구장
1969년 7월 25일 ~ 1990년 10월 30일
본관봉양 두씨
사제 수품일1953년 6월 29일 (71주년)
거주지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문화마을

개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했고, 2019년에 한국 특별 국적을 받아 한국인이 되었다. 2012년부터 이어진 한국 특별 국적 수여자 12인 중 최고 연장자이다.

정년을 맞이한 이후에는 일선에서 은퇴하고 원로 사목사제로서 활동했다.

생애

한국 생활 이전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했으며, 10~20대 시절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는 등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고향 오를레앙은 2차 대전 중 독일 점령 지역이었다. 문제는 오를레앙이 철도 요충지였기 때문에, 연합군 폭격기사령부의 주된 타격 대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두봉 주교가 유퀴즈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경험 때문에 한국에 입국했을 때 한국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그는 신학교 시절 노동사제가 되고자 생각했다. 당시에는 “신부들은 해로운 존재들이다. 부르주아다.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남의 돈을 갖는다”라는 식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에 대하여 몇몇 신부들이 “교우들에게서 왜 생활비를 받아야 되느냐? 스스로 노동자처럼 살면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으로 평일에는 노동하고 토ㆍ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사목하는 노동사제의 조직을 만들었다.

두봉 신학생 역시 이 문제로 지도 신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결국 “계급투쟁 등 공산당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노동사제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대신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로 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였던 대한민국에 파견된 것을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사목활동 초기

1950년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4년에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였고 해외 선교를 나가기로 결심하여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의 참화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런 한국에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무려 2달간 배를 타는 강행군 끝에 도착했고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대전에서 사목하면서 지역의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힘썼고, 사회활동 과정에서 성심당과 상부상조했다. 이후 1965년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1967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되었고 1969년 5월 29일 초대 교구장에 임명, 1969년 7월 25일 주교에 수품되었다. 이때 그는 “외국인 선교사는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 10년 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였다.

유교적 전통이 깊은 지역에서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해 선교활동에 전력했다. 그 일례로 1973년 가톨릭 회관을 지으면서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안동문화회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한 관할 구역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었기 때문에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건립하였고 어촌 지역민들을 위해 해성협업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상지전문대학(現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였다.

약속한 10년이 거의 다 채워져가고 이미 사임서를 제출해 두었던 무렵인 1978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았던 두봉 주교에 대한 사임ㆍ추방 압력이 거세졌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교구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것과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라며 맞섰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와 함께 바티칸으로 날아가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나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이 ‘지금 두봉 주교를 사임시키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어 두봉 주교의 사임을 철회하였고, 이 사건 이후에도 10여 년을 더 재직하다가 1990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구장 퇴임 이후

그는 언제나 가난의 영성을 강조해 왔으며, 주교직을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은퇴 후, 행여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이 될까봐 안동교구를 떠나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 공소에서 14년간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는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제의에 따라, 2004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이를 인근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이외에 전국의 성당이나 수도원 등에서 피정과 강의를 요청하는 일이 많은 데다 한국 천주교 원로 성직자인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후배 성직자들이 많아 줄곧 바쁜 생활을 했다.

2011년 크리스마스에 KBS에서는 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쁘고 떳떳하게가 방송되었다. 그 외에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미션’에도 출연하였고, 2011년 사순 시기에 명동성당에서 했던 강론들을 모아 만든 강론집도 냈다. 제목은 “가장 멋진 삶”.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2012년 제16회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대통령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과 백남인권봉사상을 수상했다.

2019년 12월 말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세상 끝의 집–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에 직접 출연하고 제작과정에서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이 외부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곳이라 촬영허가 받는게 무척 힘들었는데, 지역 교구의 원로인 두봉 주교가 직접 수사들을 만나고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

2019년 12월 12일, 드디어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기사 오랫동안 대한민국 국적법은 복수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프랑스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스스로 한국인이라 여기면서도 프랑스 국적 역시 하느님이 정해주신 것이기에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2011년 국적법 개정을 계기로 복수국적이 허용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면서도 프랑스 국적을 유지하는 복수국적자가 되었다.

2022년 1월 26일 방송된 유 퀴즈 온 더 블럭 139화에 출연했다. 초대 안동교구장을 역임한 만큼 한국에서 70년 가까이 오랜 기간 동안 사목 활동을 했고 능숙한 한국어로 안동교구장 시절에 직접 겪었던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을 설명해 주었다. 조세호와 유재석은 옆에서 두봉 주교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두봉 주교님은 우리보다도 한국에서 쌀밥과 김치와 된장을 더 많이 드신 분이다.”, “듣고 보니, 우리들보다 한국에 더 오래 계셨네요.”라고 놀라워 하기도 했다. 실제로 두봉 주교가 한국에 정착한 지는 무려 70년 가량 되었으며, 방영 당시 각각 유재석과 조세호의 나이가 각각 49세, 39세였음을 떠올리면 이 말의 의미가 실감될 것이다.

2022년 9월 10일 가톨릭평화방송의 전례 프로그램인 TV 매일미사 한가위 미사를 집전했다.

2025년 3월 16일 청주교구 강론.

2025년 3월 25일 유흥식 추기경과 함께 옥계동성당 방문.

사망

2025년 4월 6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안동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가료에 들어갔으나 4일 뒤인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95세로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감사하다” 였고 종부성사를 행했다.

저서

René DUPONT, Joseph MILLOT, 『Grammaire coréenne [한국어 문법]』, Le Léopard d’or, 1984.

두봉, 『가장 멋진 삶』, 바오로딸, 2022-10-10.